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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백양 (3 ) - 왜 우리는 자랑스럽게 白楊(人)이라 말하는가?
  뿌리 깊은 나무, 백양 (3 ) - 왜 우리는 자랑스럽게 白楊(人)이라 말하는가?
작성자 : 관리자 / 2019-04-10 오전 11:33:52
내용

 

뿌리 깊은 나무, 白楊 - (3)

 

왜 우리는 자랑스럽게 白楊(人)이라 말하는가?

사람도 아호, 애명, 별명이 있고, 예술가?배우?가수 등은 본명과 달리 예명이 있다. 학교도 그 학교를 상징하면서 교명 대신 대명사(닉네임)로 쓰는 이름이 있으니 우리학교는 그 상징과 대명사로 ‘白楊(백양)’을 별칭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동창회지(학교 校誌+동창회보=역할)의 제자(題字)를 몇 차례 변경하면서 26차례 발행하였는데(동창회보 제100호 참고) 그 중 제자를 ‘금련(金蓮)’으로 한 것이 네 차례 있었다. 즉 1932년~1935년까지 발행한 동창회보 통권 16호, 17호, 18호, 19호가 금련이었고, 광복 후 제4대 김지태 총동창회장 때 동창생들과 모교의 소식을 전하는 동창회보로 1972년에 창간호를 발행하면서 금련(金蓮)으로 명명하여 제5집까지 발행하였다. 연간으로 발행하던 동창회보 금련은 제5집에서 마감하고, 1977년 季刊誌로 바꾸고 책자형태에서 타블로이드판인 ‘釜商同窓會報’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釜商同窓會報’ 제28호까지 회보 끝 부분에 ‘金蓮動靜’이라는 특별코너를 만들어 동문들의 동정을 안내하다가 기수별 소식으로 전환하였다.

金蓮은 부전동 교정 건너편에 위치한 金蓮山을 두고 이르는 이름이라 생각된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우리 학생들의 체력을 연마하기 위하여 금련산에 토끼를 잡으러 자주 올랐고, 1928년 6월 동맹휴학 때도 학생들의 집합장소를 금련산으로 정했으며, 응원가 자이안트에 ‘금련봉 높이 솟고 아아~ 전통에 빛나는 우리’ 또 카르멘 서곡에는 “금련봉 밑 전통 깊고 역사 깊은 우리 학원” 등 금련산이 등장한다.

또한 1926년에 제정했던 교가(校歌) 제1절에 “금련의 봉우리가 빛나면 백양산도 따라 빛나고 아래에 반짝이는 동천강은 부산바다로 흘러간다”로 금련산이 등장한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우리학교와 관련하여 『금련』을 많이 사용였으나, 광복 후 1949년 1월 5일 제36회가 졸업할 때(교장 이갑도) 발행된 학교 교지(校誌) 창간호 제자가 ‘백양(白楊)’이었다. 금련 대신 백양(白楊)을 창간호 제자로 정함에 있어서 우선 학교 교직원 회의에서 결정했거나 공모를 통하여 결정했을 수도 있겠고, 혹은 동창회 집행부와도 협의를 통하여 白楊으로 정한 것은 박기종 설립자의 백양목을 심은 정신을 잘 살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2005년 일반고인 개성고등학교로 학교 체제가 전환되면서 ‘釜商同窓會報’는 학교 교명과 맞지 않아 당시 동창회보 제자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동문들의 의견을 조사한 결과 ‘白楊’이 절대다수를 차지함에 따라(총동창회장 양원석) 동창회보 제자가 ‘白楊’으로 전환되면서 타블로이드판에서 책자 형태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자 ‘楊’ 자는 버들 양자다. 그러니까 현 학교 뒤에 있는 白楊山과는 다르다.

학교 교지를 조사한 결과 白楊으로 제자를 한다는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다만 제8호(1955.12.20발행)에 ‘백양은 오늘도 자란다’는 제하에 당시 3학년 신상우(43회) 동문의 글이 실려 있었고, 그 내용 중 “우리학교의 교정에 박기종 설립자가 일본 나가사끼에서 백양목을 구입하여 학교 주변에 심었고 그 뜻은 이 백양이 자라나듯 우리도 어서 자라서 그 푸름은 온 누리를 덮고, 뻗어나는 그 뿌리는 삼천리강산 곳곳마다 굳게 얽혀져라”고 박기종 선각자가 말씀하셨다고 적혀있다. 白楊文人會에서 1년간 활동한 작품을 한 자리에 모은 창간호 제자를 ’흰버들<1999.10.20>‘로 했다가 제2호부터 白楊文學으로 바꾸었고, 제46회 동기회가 졸업50주년기념지 제하를 ’흰버들 아래에서<2010.7>‘로 정하여 발행한 바 있다.

이상의 내용처럼 우리 학교나 동창회?재학생?졸업생을 망라하여 우리의 모교나 동창회(원)을 白楊(人)이라 하는 데는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부산의 최고 선각자 박기종 선생이 1876년과 1880년 두 차례 수신사의 통역관으로 동행하면서 1868년에 실시한 일본의 명치유신 후 엄청나게 발전된 모습을 보고 민족의 중흥은 교육과 물류 수단의 발달이라는 것을 알고 개성학교를 설립하고 후에 부하철도를 설립하는 등 몸소 실천한 선각자였다.

1895년 영주동에 개성학교를 설립하고 일본의 나가사끼 우선회사에 의뢰하여 백양목 세 그루를 받아서 학교 주변에 심었다. 그 당시 심었던 세 그루의 사진이 우리 학교 역사관 백양삼세기 연혁에 나와 있다.

이 나무는 1940년 2월 28일 부산보통학교(현 봉래초등학교) 동관(東館) 화재 시 불타버렸다. 서면 교정에 있었던 백양목은 영주동 교정에 처음 심었던 백양목과는 다른 품종이었다.

1989년 당감동으로 이전 후 개교 100주년을 기하여 이원수(38회) 동문이 다시 일본 나가사끼 현에 당부하여 묘목 100주를 구입하여 학교에서 심도록 했으나 17주만 심었다고 한다. 현재 당감동 교정에는 원 품종인 백양목 17그루가 잘 자라고 있다.(이원수<38회> 동문 증언)

당시 나가사끼 시장 모토지마 히도시(本島等)는 『100년 역사의 부산상고(개성고)의 상징 수(樹)를 제공함은 영광스런 일』이라 하여 참된 국제친선의 기회임을 강조하고 쾌히 수락하여 54만엔을 투자하여 1992년 묘목 100주를 기증해 준 것을 학교 교정에 심도록 했다고 이원수(38회) 동문은 증언하였다.

박기종 선생은 왜 백양목을 심었을까!

그것도 일본 나가사끼 우선회사(선박회사)에 부탁까지 하면서.......

우리학교 교지 백양 제43호에 생물학 전공자인 최만공 교사(현 해운대 양운고등학교 교장)가 쓴 논문, “校木 ‘白楊’의 유래와 의미”에 의하면 백양목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학명은 Populus alba Linne'이고, 우리나라에는 8종 4변종이 있다고 한다. 또한 銀白楊은 문헌에 의하면 일본에 소개된 때가 1882년~1887년이고,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08년~1915년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박기종 선생은 기록보다 13년 빠르게 1895년에 모교에 심었다는 것이다.

박기종 선생이 우리 학교 교정에 심은 백양목은 은백양(White Poplar, 銀白楊)이라고 한다. 잎 뒷면이 흰색이므로 은백양(흰버들)이라고 부른다.

백양목의 특성은 아래와 같다.

1. 똑 바르게(곧게, 비교적 옆 가지가 없는 편) 자란다.

2. 생명력이 강하다

3. 번식력이 뛰어나다.

박기종 설립자께서 위의 백양목 특성처럼 개성학교 출신은 올바른 인성을 가지고 똑 바르게 성장하고, 어디에서나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하더라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하며, 수많은 졸업생이 배출되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개성학교 출신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백양목을 심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120년을 훌쩍 넘긴 古木 白楊木은 그 뿌리가 튼튼하고 깊어 태풍과 같은 거센 바람에도 아무 이상 없이 버티고 있으며, 백양 교정에서 꽃피운 백양의 홀씨는 전국 어디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잘 자라고 있으며, 그 푸름을 뽐내고 있다. 한강이남 최초의 근대학교, 민족학교인 개성학교는 교명이 12번이나 바뀌는 수난 속에서도 신학문의 횃불이 되어 민족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다 했으며, 우리나라 산업과 사회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여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나라발전의 큰 몫을 차지한 한국은행 총재도 3명이나 배출하였으며, 나아가 국가를 경영했던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대통령도 배출하였다.

우리 白楊人은 老木 白楊木을 잘 부축하여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잘 보살펴야 할 것이며, 새로운 푸른 백양목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어 나가기 위해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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