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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고역사관 개관 30주년 기념 - 동길산 시인 역사관 탐방기 2
  개성고역사관 개관 30주년 기념 - 동길산 시인 역사관 탐방기 2
작성자 : 관리자 / 2021-11-06 오전 9:55:36
내용

개관 30주년 <개성고 역사관> 탐방기 2

차고 넘치는 사람

동길산 시인

서울상고만 없어요. 대구상고, 광주상고 등등 다른 상고는 다 있는데.” 개성고 역사관 노상만 관장은 그 이유가 부산상고라고 단언한다. 최고의 명문 부산상고를 능가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학교 자체를 아예 만들지 않았다는 진단이다. 일견 수긍이 가는 말이다. 뒤늦게 서울상고를 설립한들, 그리고 아무리 공을 들인들 최소한 역사 면에선 부산상고를 능가할 상고는 대한민국에 없다.

역사만 그런 게 아니다. 학교를 거쳐 간 졸업생 면면이 부산상고는 설립 초창기부터 이미 독보적이었다. 중학교 동기 전체 수석과 2등이 부산상고로 갔듯 초창기부터 한강이남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조선팔도 수재가 다 모였다. 공부는 하고 싶었으나 근대적 공부를 배울 곳이 여의치 않던 조선의 수재가 모이면서 부산상고는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 한국 최초의 민족학교라는 자부심을 3세기에 걸쳐서 이어 올 수 있었다.

본교는 당분간 속수 및 수업료는 징수하지 않는다.’ 수재를 이 학교로 이끈 동력은 수업료 면제였다. 부산상고와 개성고의 전신인 개성학교 학칙 제13조는 수업료를 당분간 징수하지 않는다고 규정했지만 이 당분간은 오래갔다. 학교 설립 이듬해인 189631일 수업을 시작한 이래 192141일까지 무려 25년이나 이어졌다. 수업료 한 푼 받지 않고서 학교를 운영한 선각의 혜안과 헌신이 백양 3세기의 자양분이었다. 수업료 면제뿐만 아니라 졸업생은 교비로 일본 유학까지 보냈다.

면제와 유학의 특전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울산 갑부 송태관(18741940)이었다. 개성학교 2회 졸업생 송태관은 졸업 후 학교와 지역 유지의 도움으로 동경상업학교에 유학했다. 이후 간척사업 등으로 전설적인 부를 축적했다. 울산 고향 사람들이 이르기를 송 부자가 가을에 수확한 쌀가마니를 한 줄로 세우면 그 길이가 서울까지 간다고 했다. 아들도 동문이었다. 부산상고 9회 송석하는 민속학의 선구자. 국립민속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냈다.

송태관은 경주 부자 최준과 비교되는 거부였다. 부산상고는 영주동에서 서면으로 이전할 때 땅값을 비롯한 신축비용을 기부 받는다. 1924(대정 13) 발행한 동창회지에 기부자 명단과 금액이 나온다. 거기에 송태관과 최준이 1, 2등으로 나란히 이름을 올린다. 송태관 기부액은 24550. 최준은 1500원이다.

최준은 이 무렵 백산 안희제 선생이 세운 백산상회 사장이었다. 백산과 함께 일종의 자문위원인 부산공립상고 상의원(上議員)을 맡았다. 송태관은 동문이고 최준은 비동문이라서 단순 비교는 삼가야겠지만 기부액만 봐도 송태관이 얼마나 전설적인 부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거액 기부는 수업료 면제와 교비 유학에 대한 보답이었다.

백양 3세기.’ 개성고 여기저기서 접하는 문구다. 역사관, 홈페이지, 각종 홍보자료에서 접한다. 1800년대와 1900년대, 그리고 현재 2000년대를 아우르는 역사를, 그리고 그 역사에 스민 자신감이랄지 자부심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구다. 3세기 동안 학교는 영주동에서 서면으로, 그리고 당감동으로 옮겼고 교명은 12차례 바뀌었다. 학교를 옮기고 교명을 바꾸는 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안이었다. 사람인들 안 그런가. , 구성원의 공감대 형성이 전제 요건이다.

퇴학처분 180, 정학 190.’ 1920년대는 동맹파업이나 동맹휴업이 잦았다. 조선방직이며 신발공장 여공이 파업했으며 부두노동자가 파업했다. 학생들 젊은 피는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휴업했다. 19286월 아사히신문은 부산공립제2상업의 맹휴(盟休)를 중심 뉴스로 전하며 학교가 폐소(閉銷) 상태라고 보도한다.

부산공립제2상업학교’는 개성고 일곱 번째 교명. 그렇지만 변경 과정에서 구성원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인 학교에 1번을 내주고 2번으로 밀려난 그 열패감은 감내하기 어렵다. 교명 변경에 대한 반감은 동맹휴업으로 이어졌고 이는 전례가 없는 집단 퇴학과 정학으로 이어졌다. 교명 변경은 내건 명분에 불과했다. 불공정과 불합리, 몰상식, 나아가 일제의 부당함에 대한 항거였으며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학생다운 항변이었다.

먼저 사람이 되자.’ 개성고 정문 큼지막한 화강암 석비에 새긴 문구다. 학교가 서면에 있던 1972년 세웠다. 당감동으로 이전할 때 같이 왔다. 20년 최장수 동창회장을 지낸 김지태 동문(14)이 비용을 댔고 문구는 수차례 교직원 회의에서 정했다. 공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공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 개성고 역사관엔 개성고를 거쳐 간 사람이 차고 넘친다.

dgs1116@hanmail.net

<본 탐방기사는 부산진구청에서 후원하여 동길산 시인께서 우리역사관을 방문하여 오랜시간 동안 취재하신 내용입니다. 서은숙 부산진구청장님께서 우리 역사관을 방문하시고, 개성고역사관은 부산의 개항사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품고 있는 역사자료가 많이 전시되어 있음으로 우선 부산진구 구민들께서라도 먼저 관람을 하도록 권유하는 뜻에서 '부산진구청신문' 을 통해 구민들에게 홍보차원에서 기획된 것입니다. 서은숙 구청장님, 부산진구신문편집장 차대진, 동길산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개관 30주년을 맞아 부산시민, 국민과 함께하는 개성고등학교역사관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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